"누군가를 업어주다"는 영어로 "give somebody a piggyback"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여기 조금 괴상한 표지를 가진 그림책이 있습니다. 한 여성의 등에 다 큰 성인 남성과 아이들 둘까지 세 명이나 켜켜이 업혀있습니다. 업혀 있는 세 명의 표정은 아주 밝고, 이들을 업고 있는 여성의 표정은 어둡지요. 책 제목은 "Piggybook"... 자연스레 "piggyback"이라는 단어가 연상되는 장면이에요.
가끔, 시간과 장소, 문화를 가로질러 특정 표현이 너무나 똑같은 뜻으로 사용되어서 놀라울 때가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요즘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인 "~에게 업혀가다"라는 말을 연상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무임승차하다, 빨대꽂다, 숟가락 얹다" 등의 표현으로 변주되는 이 말은 우리 모두 알다시피, "어떤 일을 하는데 기여하는 바 없이 남의 노력에 편승하다" 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영어에도 "try to piggyback on someone"이라는 비슷한 표현이 있지요.
그럼, 도대체 이 가정에서는 누가, 누구의 노력에 빌붙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Piggot 씨는 두 아들 Simon, Patrick과 함께 아주 좋은 집에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 안에는 그의 아내가 "있지요." 여기에서 아버지와 아들들은 "살고(lived)" 있는 반면, Mrs. Piggot은 그저 집 안에 "있다(was)"로 표현되는 점은 주목할 만 합니다. 마치 물건처럼 그저 존재하는 것이지요.
Mr. Piggot lived with his two sons, Simon and Patrick,
in a nice house with a nice garden, and a nice car in the nice garage.
Piggot씨는 그의 두 아들인 Simon, Patrick과 함께
좋은 정원을 가진 좋은 집에서, 좋은 차고 안의 좋은 차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Inside the house was his wife. 그 집 안에는 그의 아내가 있지요.
Piggot씨와 두 아들들이 Piggot 부인이 차려준 아침을 먹고, 그들의 "아주 중요한" 일들을 하러 집을 나서면, Piggot 부인은 설거지를 하고, 침대를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나서야 자신의 일터로 갑니다. 저녁에도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죠. "아주 중요한" 그들의 학교와 일터에서 돌아온 Piggot씨와 아들들이 저녁을 먹고 쉬는 동안, Piggot 부인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또 음식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와 직장에서 돌아온 Piggot씨와 그 아들들을 맞이한 것은 Piggot 부인의 따뜻한 저녁식사가 아니었어요. 대신 아주 강력한 효력을 지닌 한 줄의 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죠.
On the mantelpiece was an envelope. 벽난로 위에는 봉투가 하나 있었죠.
Inside was a piece of paper. 그 안에는 종이가 한 장 있었구요.
"You are pigs." "너희들은 돼지야."
마치 마법을 지닌 주문처럼 "You are pigs."라는 선언이 공개되자 마자, Piggot씨와 두 아이들은 돼지로 변신했습니다. 그동안 집안의 모든 일을 해 나갔던 Piggot 부인이 사라지자, 그들은 우왕좌왕 아무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돼지로 변한 그들의 행색에 맞게 집안은 돼지우리처럼 변해갔어요. 그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기 직전이 되었을 때, Piggot 부인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986년에 출간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앤소니 브라운(Anthony Browne) 작가의 가장 유명한 책 중 하나인 이 책을 사실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접하지 못했습니다. 책에 여자아이가 등장하지 않아서인지, 딸아이에겐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이 책이, 아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나봐요. 어느 날, 어린이집에 다녀온 아이가 이렇게 묻더라구요. "엄마도 우리 버리고 가? 그러면, 우리가 돼지가 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싶어 자세히 물어봤더니 바로 "돼지책"으로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된 이 책에 대한 이야기 였어요.
5살 정도였을까요? 요리도, 청소도, 빨래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이 책 속의 아들들과 비슷해 보였는지, 아이는 상당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제 표정을 살폈죠. 하지만, 무려 지금부터 38년 전에 발간된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무렵, 엄마의, 또 아내의 얼굴 표정과 마음을 살피는 가족들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그런 당시 상황을 반영하듯이, 책의 앞 부분에 나오는 Mrs.Piggot 은 아무 표정이 없고, 그녀의 얼굴은 대부분 가려져 있습니다. 그녀가 나오는 장면은 오래된 그림처럼 흐릿하게 표현되어 있는 반면 아이들과 아빠는 선명한 색채로 그려져 있죠. 세밀하고 정확한 묘사를 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상상력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가, 앤소니 브라운은 이 그림책의 곳곳에도 여러가지 상징적인 단서들을 남겨놓습니다. 소파에 늘어져 있는 남편의 그림자는 돼지의 모습이고, 돼지가 되어 아무 것도 제대로 해 내지 못하는 가족들을 창밖에서 들여다 보고 있는 그림자는 이 가정을 호시탐탐 노리는 늑대(꼬마 돼지 삼형제에 나오는?)처럼 보이네요.
성 역할에 따른 고정관념 및 성 차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지나치게 무거워지는 법 없이 아이들이 이해하기 좋은 수준으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몇 십년 전의 책이다보니, 요즘 실정과 완전히 맞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 있지요.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가정 내에서의 성 역할 고정관념에 대한 논의은 물론이고, 성별과는 별개로 사회 속에서 각자 공정한 자신의 몫을 해 나가는 책임감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일을 가능한 한 스스로 해 나가는 자율(autonomy)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지요.
영어에는 "homemaker"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주부를 뜻하는 단어인 "housewife"가 아무 직업을 가지지 않고, 집에 있는 부인을 살짝 비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 이 "homemaker"라는 단어는 성별에 관계없이,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 또한 하나의 직업임을 뜻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것은 누구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가족 모두가 "homemakers"가 되어 자기 몫을 해 내어야만 가능한 일일 것 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업혀가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서로를 밀고 끌고 가야하는 일이지요.
작가 홈페이지 https://www.anthonybrownebooks.com/
원어민이 읽어주는 오디오북 https://www.youtube.com/watch?v=t8_vZaer5lc
권장연령 3~7 세 / Lexile 지수 45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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