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름이 과연 지나가기는 하는 걸까요? 처서(處暑)도 벌써 지난 요즘이지만, 아직 30도를 오르내리는 기온은 지구온난화를 피부로 느껴지게 만듭니다. 우리나라가 아열대 기후가 된 것인지 이번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왔습니다. 40도에 가까운 기온속에서 그나마 내린 비마저 지열을 받아 금새 수증기로 피어오르곤 했지요. 하지만, 찜통을 연상시키는 그 숨막히는 여름날에도 비 온 뒤의 공기는 풀냄새와, 바람냄새, 흙냄새를 아련히 흩뿌리곤 하지요.
영어에는 바로 이 비 온 뒤의 냄새를 뜻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The smell of rain on dry earth(마른 땅에 내린 비의 냄새)"라는 뜻을 가진 "Petrichor"라는 이 단어는 "돌"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Petra"에 그리스 신화 속에서 신들의 황금빛 피를 뜻하는 단어인 "ichor"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이루어집니다.
사실 이 단어는 상당히 최근에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1964년, 호주의 두 연구자는 식물에서 분비되는 오일과 흙속에 서식하는 박테리아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이 합쳐져서 노란 기름과 같은 물질을 만들고, 이 물질은 비가 내리면 바위, 흙으로부터 발산되어 흔히 우리가 비 냄새라고 칭하는 냄새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 냄새를 "돌 속에 흐르는 신성한 피"라고 명명하고 과학저널인 "Nature"지에 발표하게 되지요.
이 아름다운 단어가 과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져 세계적인 과학저널에서 처음 발표된 단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과 전공자가 인문학적 소양을 가질 때, 얼마나 훌륭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명백한 예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들은 그저 이 냄새를 그 속에 있는 화학적 물질의 원소나 분자 이름으로 명명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랬다면, 이 단어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고,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 리스트에 그 이름을 올리는 지금의 상황이 가능했을까요?
그리스 신들의 몸에 흐르는 황금빛 피를 뜻하는 "ichor"는 불멸의 존재인 신들을 필멸인 인간과 구분하는 물질로 신들의 불멸의 원천이자, 그들의 힘과 신성함의 상징입니다. 이렇듯 신비주의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ichor"와 달리 "Petra"라는 단어는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는 돌을 의미하고, 그 어원을 공유하는 단어들도 대부분 돌과 관련된 단어들 뿐입니다. "petroleum(석유)", "petrify(석화시키다)", "petroglyph(암각화)", "petrology(암석학)" 등 모두 그저 단단한 돌과 관련된 단어들이지요. 하지만, 그저 돌이었던 "Petra"라는 말에 "ichor"라는 신화적 상상력이 덧붙여짐으로써 하나의 풍부한 이야기를 가진 단어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과적 지식에 문과적 상상력을 결합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단어들 중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Cosmos(질서있는 우주: 그리스 철학의 질서라는 말에서 유래)" "vitamin(생명에 관련된 물질을 의미)" "pandemic(대대적인 전염병: 모든 사람들을 의미)" "hygiene(위생: 그리스 건강의 여신에서 유래)" 등 그들 대부분은 우리에게 구체적 과학적 지식보다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우스개 소리처럼 퍼져있는 요즘, 우리의 아이들이 좀더 인문학적 감성을 가진 어른으로 자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 아닐지 문득 걱정이 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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